검도의 금지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쇼와20년(1945) 8월15일 종전을 맞이 합니다. 쇼와26년(1951)의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체결까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군의 점령하에 놓입니다. 이 사이 G H Q(연합국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 는 여러가지 점령정책을 실시 합니다. 무도가 전쟁에 적지않게 가담해 왔다는 경위를 가지고 , GHQ 의 민간정보교육국(C I E) 의 지시아래 학교에 있어서의 무도교육의 금지 , 무도라는 말의 사용금지 , 대일본무덕회의 해산 등 , 엄격한 조치가 행해 지게 됩니다. 특히 검도에 관해서는 「검도는 전시중에 도검들을 병기로 해서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사용할 것인가를 훈련하는 것에 이용되었다는 사실이 있기 때문에 군사적인 색조를 일절 빠른 시일에 불식 시키려고 ..
15 . 쇼와시대의 검도 쇼와 천람시합天覧試合 쇼와의 검도는 처음부터 크게 융성하는 양상을 띱니다. 그 상징적인 사건이 쇼와에 들어서 세 번나 치루어진 천람무도대회天覽武道大會(천황이 관전하는 시합) 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회째는 쇼와천황의 즉위를 기념해서 쇼와4년(1929) 5월 4일 과 5일에 , 궁성내의 `산노마루 오오이노바바` 및 `사이네이칸` 에서 행해 졌습니다 , 어대례기념御大禮記念 쇼와 천람무도대회 입니다. 궁내성이 전문가들 속에서 지정한 지정선사指定選士 의 부와 각 부현府縣의 예선을 이기고 올라온 부현선사府縣選士의 부 두 개로 나누어 시합이 치뤄졌습니다. 이때 지정선사의 부에서 우승한 것이 , 쇼와의 검성劍聖이라 불리던 `모찌다 모리지持田盛二`(조선총독부 경무국사범...저도 이제 안 사실..
무술전문 학교의 창설 대일본 무덕회는 무술교원을 양성할 필요성에서 메이지 38년(1905) 무술교원 양성소를 개설 했습니다. 이것이 메이지44년(1911) 에 무덕학교가 되고 , 다음해 메이지45년에 무술 전문학교가 됩니다. 검도는`나이토 타카하루内藤高治` 가 주임 교수를 맡고 , 대련 , 연격 , 전공 등의 기본케이코를 철저히 해서 행하게 했다고 전하는데 , 그 엄격함은 현재에도 이어져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독한 케이코로 유명한 , 「무전武傳」 이라 불리는 무술의 전문가를 양성하는 기관 입니다. 현재에는 , 무술武術이나 무예武藝를 무도武道라고 말하고 , 검술劍術을 검도劍道라고 말합니다만 , 이것이 언제부터 이렇게 불리게 되었는지 의문을 가졌던 분들도 많았을 것 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무술전문학..
14 . 근대 검도의 발자취 경찰검도의 시작 메이지 유신에 의해 위기적 상황에 있었던 검도가 다시금 성행하게 되기 까지는 ,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계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이것은 메이지10년(1877)에 일어난 `세이난西南 전쟁` 에서의 경찰청 발도대拔刀隊의 활약 입니다. 메이지 신정부의 급격한 변혁에 불만을 가졌던 사무라이 들은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킵니다만 , 카고시마鹿児島 무사들이 정부를 물러난 ‘사이고 타카모리‘를 옹립해서 일으킨 최대의 난이 `세이난의 변` 입니다. 검술에 뛰어난 이들을 선발해서 결성된 발도대의 ‘타바루자카田原坂(세이난 전쟁의 격전지 , 지금의 쿠마모토 현)‘ 에서의 활약은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봐야 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고 전합니다. 당시의 경시청 대경시 였던 `카와지 토시..
야마오카 텟슈山岡鉄周 와 수양검도修養劍道 한 사람 더 , 이 시기에 검도의 전통을 이으며 ,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인물로 , 야마오카 텟슈(1836~1888) 를 들지 않을 수 없겠지요. 야마오카 텟슈는 막부 말에 무력에 의한 막부 타도를 도모하고 있던 사츠마薩摩 번의 사이고 타카모리 西郷隆盛와 반대 편에 서서 , 에도(지금의 토쿄) 로의 공격을 저지하고 , 무혈의 상태로 대정봉환을 달성시킨 영웅 입니다. 또한 유신이후는 메이지 천황의 시종을 맡아서 천황의 아래로는 그 누구에게도 비길때 없는 신용을 얻은 인물이기도 합니다. 몸집이 크고 호쾌한 무인武人 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그는 , 대주대식大酒大食 등의 많은 일화가 전해 지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철저히 끝까지 하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았다는 성격..
13 . 근대의 개막 메이지 유신과 무도의 위기 막부 말로 부터 명치시대에 걸쳐 검도를 시작으로 무도를 둘러싼 사회정세는 격변을 맞이 합니다. 막부는 페리의 강경한 개국요구에 응해서 안정安政 원년(1854)에 일미화친조약을 체결 합니다. 이어서 영국 러시아 네델란드 등과도 조약을 체결하고 200년 이상 이어진 쇄국체제에 종지부를 찍습니다. 오랜시간에 걸쳐서 외국과의 접촉을 끊어온 일본인에게 있어서 이 급변하는 변화는 외국인 배척(양이) 운동이 격화하는 등 큰 혼란을 부르며 이것이 막부를 타도하자는 운동에 까지 발전해 갔습니다. 쵸슈長州 번의 `타카스키 신사쿠高杉晋作` 와 `카츠라 코고로우桂小五郎` , 사츠마薩摩 번의 `사이고 타카모리西郷隆盛` , `오오쿠보 토시미치大久保利通` , 토사土佐 번의 `사카모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