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검도의 역사...(31)

 

13 . 근대의 개막

 

메이지 유신과 무도의 위기

 

막부 말로 부터 명치시대에 걸쳐 검도를 시작으로 무도를 둘러싼 사회정세는 격변을 맞이 합니다.

막부는 페리의 강경한 개국요구에 응해서 안정安政 원년(1854)에 일미화친조약을 체결 합니다. 이어서 영국 러시아 네델란드 등과도 조약을 체결하고 200년 이상 이어진 쇄국체제에 종지부를 찍습니다.

오랜시간에 걸쳐서 외국과의 접촉을 끊어온 일본인에게 있어서 이 급변하는 변화는 외국인 배척(양이) 운동이 격화하는 등 큰 혼란을 부르며 이것이 막부를 타도하자는 운동에 까지 발전해 갔습니다. 쵸슈長州 번의 `타카스키 신사쿠高杉晋作` 와 `카츠라 코고로우桂小五郎` , 사츠마薩摩 번의 `사이고 타카모리西郷隆盛` , `오오쿠보 토시미치大久保利通` , 토사土佐 번의 `사카모토 료마坂本竜馬` 등의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역사를 크게 움직여 가게 됩니다.

 제 15대 장군이 된 `토쿠카와 요시노부徳川慶喜` 는 경응慶応3년(1867) 에 대정봉환을 합니다. 에도시대의 장군은 천황으로 부터 정이대장군으로서 정권을 위임 받는 형태를 취해 왔습니다만 이 정권을 천황에게 반환 했다는 것 입니다. 이러한 경위를 거쳐 메이지明治 원년(1868)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신 정부가 성립 했습니다. 소위 말하는 메이지유신 입니다.

신정부는 여러가지 다양한 개혁을 단행 했습니다만 여기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 사농공상士農工商 이라는 엄격한 신분제도를 유지하던 것을 사민평등四民平等으로 만든것 이라 하겠습니다. 무사계급 자체가 소멸했다는 것이기도 하고 , 무사가 행해야 했고 즐거움 이기도 했던 무도武道에 있어서는 상당히 큰 문제 였습니다. 또한 메이지9년(1872) 에는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을 금지하는 폐도령廢刀令이 내려지고 무사의 상징이던 칼 조차 몸에 지니는 것을 허락 받지 못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급격하게 근대화가 진행되었던 문명개화 속에서 , 서구로 부터 유입하는 문명에 사람들의 관심은 빼앗기고 전근대적인 무도에서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는 풍조가 높아져 가면서 , 무도는 크게 쇠퇴 합니다. 서양열강의 중화기 앞에서 일본고래의 무술이 무의미하게 보이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 이었습니다.

일본무도가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 시기라고 해도 좋겠지요.

 

 

`사카키 바라 켄키치榊原鍵吉` 와 격검撃剣의 흥행

 

이러한 무도의 위기적인 상황속에서 검술을 구해낸 두 명의 인물을 들 수가 있습니다. 우선 한 사람 , `사카키 바라 켄키치`(1830~1894) 입니다.

`사카키 바라 켄키치`는 `지키신 카게류直心影流` 의 `오타니 세이이치로男谷精一郎` 의 문하생 이었습니다. 사카키 바라의 집은 대대로 토쿠가와 막부의 신하 였으나 유복한 가정이 아니라 , 불편한 생활을 하면서도 오타니의 지도 아래에서 열심히 수행을 이어가 , 면허개전을 받았습니다. 안정安政3년(1856) 에 강무소가 개설되자 , 오타니의 추천으로 검술지도교범 임명되어 뒤에 사범의 지위까지 승진 했습니다.

후에 메이지시대가 되고 나서 입니다만 , 메이지 천황의 앞에서 오로지 한 사람 , 투구 자르기를 성공시킬 정도로 검劍의 명수名手 였습니다.

메이지 유신에 의해 , 그 전의 막부 강습소와 각 번의 사범을 하고 있었던 검술가는 직업을 잃게 되었고 생활에 필요한 식량조차 없어서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어떻게든 구하려고 , `사카키 바라 켄키치`는 격검흥행 이라는 대중에게 검술을 보이는 행사를 개최합니다.

이것은 스모의 흥행과 같이 , 작은 가옥을 마련하고 동서로 나뉜 검사들이 하는 시합을 관객에게 보이고 엽전을 받는다는 것 이었습니다. 시합은 시합장을 정하고 , 정해진 길이(3척8촌 115cm) 의 죽도를 사용해서 3판 승부로 행해 졌습니다. 이미 경기로서의 형태를 갖추고 있어서 그 후의 경기화로의 방향성을 제시 했다고 하겠습니다.

메이지6년 (1873) 에 `사카키 바라 켄키치`에 의해서 처음으로 행해지게 된 격검흥행은 출장선수도 일류들만이 모였고 , 그때까지 검술과는 인연이 멀었던 일반 서민도 입장료만 내면 유명한 선수의 시합을 볼수 있기도 하고 , 또한 그 자리에서 참가하는 일도 가능해서 대성황을 이루었습니다.

이것과 나란히 사카키 바라 외에도 검술의 흥행을 도모하는 이들이 많이 나타나서 , 손님의 발길을 잡으려고 기발한 기술을 쓰거나 , 연극과 비슷한 연출을 넣거나 해서 저속한 것이 늘어나지만 저절로 쇠퇴해 갑니다.

`사카키 바라 켄키치`의 격검흥행에 대해서는 , 찬부양론이 있습니다. 이것을 비난하는 의견으로는 , 무사의 자랑이던 검술을 세간의 구경거리로 만들어 그 권위를 실추시켰다는 것 입니다. 역으로 이것을 평가하는 의견으로는 , 생활에 궁핍해 있던 검술가를 구하고 검도의 대중화에도 공헌 했다는 것 입니다.

어느 것 이나 타당한 주장 입니다만 , 당시 , 절멸 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조차 있었던 검술의 명맥을 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것 이고 , 검도사 속에서 `사카키 바라` 라는 인물이 이룩한 역할은 컸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