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검도의 역사...(29)

 

오오이시 스스무大石進 사건

 

`오오이시 스스무`는 특히 검도 역사상 중요한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오이시 스스무는 조부로 부터 ‘오시마大島류‘ 창술과 ‘아이스愛洲 카게류‘ 검술을 주입받고 면허를 받기도 했습니다. 오오이시는 양 손 찌르기 , 왼 손 하나 만으로 찌르기 , 여기에 더해서 허리 몸통베기 등의 기술을 사용했습니다. 돌을 매달아 놓고 이것을 찌르는 케이코를 했다고 전해지는 그는 , 특히 왼 쪽 한 손찌르기를 즐겨했다고 전해 집니다. 오오이시가 찌르기 기술을 특기로 한 것은 , 그가 창술을 이미 충분히 숙지한 것과 관계가 없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오이시는 호구에 독자적인 개량을 더하고 , 5척 3촌(161.4cm)이나 되는 긴 죽도를 사용했습니다. 통설에 의하면 이 길이를 만들기 위해서 , 종래의 `주머니 죽도`가 아니라 현재의 죽도와 같은 모양의 것을 고안했다고 전해 집니다. 결국 `주머니 죽도` 와 같이 죽도를 잔잔한 솔 상태 처럼 해서는 , 길게 만들었을때 지나치게 휘어져 버리기 때문 입니다.

네 등분이 된 죽도를 보급한 것은 오오이시가 장죽도를 사용하게 되고 나서 그 이후의 일 입니다.

`오오이시`는 , 제일 먼저 큐슈 일대를 무사수행해서 돌아 봅니다만 , 이것에 보람과 자신감을 느끼고 , 만족해서 에도로 상경 입성합니다. 오오이시는 신장이 7척(2.12m) 이라 말해질 정도로 큰 체구의 남자로 , 이 장신으로 긴 장죽도를 구사한 한 손 찌르기를 반복해서 냈고 , 에도의 고명한 사범들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았다고 합니다. 양 손으로 검을 쓰고 , 머리 기술과 손목 기술을 중심으로 했던 당시의 에도의 검술가들에게 오오이시는 `충격적` 그 자체 였을지도 모릅니다.

`오타니 세이이치로` 와의 결투도 유명한 것으로 , 처음에는 오오이시의 찌름을 빗겨나가게 했던 오타니도 후일의 시합에서는 피하지도 못하고 실로 감당하기 어려워 했다고 전합니다.

또 , `치바 슈우사쿠` 가 , 규칙 이외의 긴 죽도를 사용하는 `오오이시 스스무`에 대해서 `그렇다면 이쪽도` 하고 생각한 슈우사쿠가 큰 나무통의 뚜껑을 코등이로 해서 시합을 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만 , 이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어떻든 이러한 전설이 있는 것으로 보아 , 에도시대에 `오오이시 스스무`의 분투하는 모습은 상당히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장죽도長竹刀의 유행과 발놀림의 변화

 

오오이시 스스무와 별도로 에도 무사수행에 왔던 `카토다 헤이 하치로우加藤田平八郎` 도 장죽도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에도에서는 긴 장죽도가 대유행을 합니다. 이것이 일본도의 기술로 부터 멀어져 있는 것은 명백한 것으로 , 장죽도에 대한 비판이 꽤나 오래 일어납니다.

또 이 장죽도를 사용해서 하는 찌르기 기술도 유행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과 관계가 있는 것인지 , 천보년간(1831~1845) 의 호구에는 그때까지는 없었던 찌르기 가림막이 호면에 붙게 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천보년간 이 후의 도구는 현재 저희들이 사용하고 있는 것과 크게 차이는 없습니다.

장죽도의 유행은 기술 그 자체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현재의 검도는 오른 손 오른 발이 앞에 있는 카마에를 기본으로 하고 통상은 걷는 발(아유미 아시歩み足)을 사용하지 않고, 왼 발이 오른 발을 넘어서 나오는 일이 없는 내 보내발 (오쿠리 아시送り足)로 이동하고 , 타돌시에는 바닥을 강하게 딛고 들어가는 발을 사용합니다. 정확하게 논증이 된 것은 아닙니다만 이러한 발 사용은 , 이 장죽도가 등장한 탓에 고안되어진 기술이 아닌가 생각되어 집니다. 이것을 `호리 쇼우헤이堀正平` 씨가 『대일본 검도사大日本劍道史』 에서 쓰고 있습니다만 , 죽도가 짧았을 때는 평소에 걷는 듯한 발놀림으로 괜찮았습니다만 , 죽도가 길어지면서 손잡이도 길어지고 , 걸어가듯이 하면 이것이 움직이고 흔들리기 때문에 좌우 순서로 옮겨가는 `오쿠리 아시送り足`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발놀림에서 강하게 날카롭게 타돌하려고 하면 , 필연적으로 큰 발로 내딛는 발놀림이 발생하는 것은 쉽게 예상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