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검도의 역사...(27)

 

 

북진일도류北辰一刀流  치바 슈우사쿠 의 현무관玄武館

 

`치바 슈우사쿠千葉周作`는 관정寛正6년(1794) 오우슈奥州 (지금의 미야기 현)에서 태어나 , 아명을 `오토마츠於菟松` 라고 했습니다. 조부인 ‘치바 키치노 조우千葉吉之丞‘는 이와키磐城国 국의 소마 相馬번의 검술사범으로 스스로 유파를  `북진몽상류北辰夢想流(호쿠신 무소류)` 라고 칭했습니다만 , 후에는 의사로 전업합니다. 슈우사쿠의 아버지도 같은 의사 였습니다만 , 집안에 전해지는 검술에 있어서는 뛰어난 기량을 가졌었다 합니다. 슈우사쿠는 후에 , 작은 치바 라고 불리던 남동생 `사다키치定吉` 와 함께 이 아버지로 부터 대대로 이어진 북진몽상류를 배웁니다.

문화文化 6년 (1809) 에 이 부자는 , 에도근교의 `마츠도松戸`로 이사합니다. 슈우사쿠는 이 즈음 , 잇토우류一刀流 에서 이름을 날리던 `아사리 마타시치로 요시노부浅利又七郎義信` 를 만나 , 그 도장에 입문해서 배우게 됩니다.

`아사리 마타 시치로`는 소년시절 , 바지락을 팔기도 했습니다만 , `나카니시 츄우베이 츠구마사中西忠兵子正` 의 도장의 케이코를 열심히 보고 있다가 허락을 얻어서 잇토우류를 배웠고 , 면허개전免許皆傳까지 되었던 것 입니다.

`슈우사쿠`는 `마타시치로` 의 권유로 `나카니시 츄우베이 츠구마사 `의 곁에서도 수행을 했습니다만 , 후에는 여기를 떠나서 `북진몽상류` 와 `일도류`를 융합시킨 `북진일도류`를 창설하게 됩니다.

문정文政3년 (1820) 부터 각지를 돌며 무사수행을 하고 문정5년(1822) 에 에도로 돌아와 니혼바시日本橋 시나가와 거리 에 현무관玄武館 이라는 도장을 열게됩니다. 그 후 , 문정8년 (1825) 에 이 도장을 칸다神田 오타마가 이케 로 이전 합니다.

`치바 슈우사쿠`의 현무관에서는 합리적인 지도로 그 평판이 높았고 , 미토水戸 번의 번주 였던 `토쿠가와 나리아키徳川斉昭` 에게도 인정을 받아서 , 미토 번에 출장을 가거나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의 공적으로 특히 기록해야 할 것은 "죽도 대련 검술" 의 기법을 체계화 해서 「검술 육십 팔 수劍術六十八手」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것은 현대 검도에 커다란 영향을 안긴 것 입니다.

슈우사쿠의 도장은 크게 번창해서 , 문하생으로는 야마오카 텟슈山岡鉄舟 , 사카모토 료마坂本竜馬 , 키요카와 하치로清河八郎 등 많은 저명한 검사들을 배출했습니다.

 

 

신도무념류神道無念流  `사이토우 야쿠로斉藤弥九郎` 의 연병관錬兵館

 

`사이토우 야쿠로` 는 관정寛正10년(1798) 에츄노 쿠니越中国(현재의 토야마 현) 에서 태어나 문화文化9년(1812) 에 에도로 와서 신도무념류의 `오카다 쥬마츠 요시토시岡田十松吉利` 의 격검관擊劍館에 입문합니다.

원래가 신도무념류는 `후쿠이 효에몬 카헤이福井兵右衛門嘉平` 가 시나노 국信濃国에 있는 `이즈나 곤겐飯綱権現` 사당에서 참롱 수행 후에 깨달음을 얻고 창시한 것이라고 전해 집니다. 이 `효에몬`의 뒤를 이은 것은 , `토가사키 쿠마타로 테루요시戸賀崎熊太郎輝芳` 입니다. `테루요시`는 공공연 하게 타류시합이 금지되었던 시대에도 불구하고 , 회국수행을 하며 기술을 연마하고 , 그 후에 에도에 도장을 마련합니다. 문하에 3000명 남짓 이었다 하니 , 그 번성함을 짐작 할 수 있습니다. 이 도장을 `테루요시` 로 부터 맡은 이가 `야쿠로`의 스승인 `오카다 쥬마츠` 입니다.

쥬마츠의 사후 `사이토우 야쿠로`는 이 뒤를 이어 , `이다마치飯田` 거리에 있던 마나이타 바시에 연병관을 엽니다.

야쿠로의 문하에서는 , `카츠라 코고로桂小五郎` `타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 등 막부 말의 혼란스러운 시대에 많은 유지들을 배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