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검도의 역사...(32)

 

 

야마오카 텟슈山岡鉄周 와 수양검도修養劍道

 

한 사람 더 , 이 시기에 검도의 전통을 이으며 ,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인물로 , 야마오카 텟슈(1836~1888) 를 들지 않을 수 없겠지요.

야마오카 텟슈는 막부 말에 무력에 의한 막부 타도를 도모하고 있던 사츠마薩摩 번의 사이고 타카모리 西郷隆盛와 반대 편에 서서 , 에도(지금의 토쿄) 로의 공격을 저지하고 , 무혈의 상태로 대정봉환을 달성시킨 영웅 입니다. 또한 유신이후는 메이지 천황의 시종을 맡아서 천황의 아래로는 그 누구에게도 비길때 없는 신용을 얻은 인물이기도 합니다.

몸집이 크고 호쾌한 무인武人 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그는 , 대주대식大酒大食 등의 많은 일화가 전해 지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철저히 끝까지 하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았다는 성격으로 , 검劍 뿐만이 아니라 선禪이나 서적에 있어서도 상식으로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의 지독한 수련을 했다고 전해 집니다.

9살에 검劍의 도道에 입문한 텟슈는 , 「`보로`(쓰던 물건이나 옷이 너덜너덜해 질 정도로) 테츠」「`오니`(귀신 , 도깨비) 테츠」 라고 불릴 정도의 지독한 수련을 이어가서 메이지13년 (1880) 3월 30일 , 「내가 있으니 적이 있는 것이요 , 내가 없다면 적도 없다」 라는 진리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마치 `잇사이 쵸우쟌` 의 『고양이의 묘술』에 나오는 늙은 고양이의 심경과 같은 것 입니다. 상당히 철학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경지 입니다만 , 탁상에서의 공론이 아니라 철저한 단련의 끝에서 이르게 된 극의極意 입니다.

텟슈는 무도류無刀流 라는 유파를 창시 합니다. 「心外無刀」( 마음의 바깥에는 칼이 없다)는 의미 라고 합니다.

그 후 , 춘풍관春風館 이라는 도장을 세우고 제자들의 지도에 임합니다만 , 여기에서의 케이코도 텟슈 특유의 지독함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쉬지 않고 계속해서 들어오는 도전자와 시합하는 `타치키리 시아이立ちきり` 를 하루에 200시합 이나 행한다고 하는 식 이었습니다. 이것도 수행단계에 따라서 3일간 600회 하는 사람 , 7일간 1400회 시합을 하는 사람까지 있었다고 전합니다. 이러한 상식의 범위를 일탈한 케이코 방법은 , 스스로가 극한에 이르기 까지 자신을 몰고가서 마음을 단련하고 연마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험난한 케이코 입니다. 적당히 승패에만 가치를 찾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 인간으로서의 정신적인 강함 , 뛰어남을 추구 한다고 하는 , 수양修養의 문제로서 검술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 여기에 `야마오카 텟슈`의 특징이 있다 하겠습니다.

물론 근 현대의 검도는 경기로서의 측면을 가지고 성립해 있습니다만 , 한 편으로는 검의 수행을 통해서 인간형성을 목적을 하는 수양론적인 성격을 겸비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교육적인 효과가 있고서 비로소 근 현대 사회에 있어서 검도의 존재의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러한 검도의 수양적인 성격은 무도武道가 위기적인 상황에 있었던 시대에 , 야마오카 텟슈라는 인물에 의해서 그 방향이 잡혔다고 해도 좋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