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무소講武所에 의한 죽도의 규정과 유파검술의 통일 막부 말이 되면 검술은 새로운 단계를 맞이 하게 됩니다. 가영嘉永6년(1853) 6월 , 아메리카 동인도 함대 사령장관 페리의 내항사건에서 대표되는 것 처럼 해외열강으로 부터의 압력이 강해지자 군비의 충실을 재촉 당하게 된 막부는 안정安政3년(1856) 늦은 감은 있었지만 강무소를 설립 하였습니다. 강무소에서는 검술 창술 포술 을 중심으로 한 교습이 행해졌습니다. 강무소 최고 책임자로 임명되어 검술부분의 사실상 최고의 자리에 이른 것은 , 장죽도를 사용한 오오이시 스스무 와 맞서 싸운 `오타니 세이 이치로男谷精一郎` 였습니다. ‘오타니‘는 실용적인 관점에서 죽도의 길이를 3척8촌(117.3cm) 으로 정했습니다. 이 길이로 정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로..
오오이시 스스무大石進 사건 `오오이시 스스무`는 특히 검도 역사상 중요한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오이시 스스무는 조부로 부터 ‘오시마大島류‘ 창술과 ‘아이스愛洲 카게류‘ 검술을 주입받고 면허를 받기도 했습니다. 오오이시는 양 손 찌르기 , 왼 손 하나 만으로 찌르기 , 여기에 더해서 허리 몸통베기 등의 기술을 사용했습니다. 돌을 매달아 놓고 이것을 찌르는 케이코를 했다고 전해지는 그는 , 특히 왼 쪽 한 손찌르기를 즐겨했다고 전해 집니다. 오오이시가 찌르기 기술을 특기로 한 것은 , 그가 창술을 이미 충분히 숙지한 것과 관계가 없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오이시는 호구에 독자적인 개량을 더하고 , 5척 3촌(161.4cm)이나 되는 긴 죽도를 사용했습니다. 통설에 의하면 이 길이를 만들기 위해서 ..
경신명지류鏡新明智流 `모모노이 슌조우桃井春蔵`의 사학관士學館 `쿄우신 메이치류鏡新明智流`는 안영安永년간(1772~1781) 에 `모모노이 하치로 자에몬 나오요시桃井八郎佐衛門直由` 가 창시한 것 입니다. `나오요시`는 원래는 `야마토 코리야마大和郡山` 번(현재의 나라현) 의 `야나기 사와柳沢` 가문의 가신 이었습니다만 , 사임하고 무사수행을 해서 , 토다戸田류 , 잇토우一刀류 , 야규柳生류 , 그리고 호리우치堀内류 등을 배우고 안영2년(1773) 에 에도의 니혼바시日本橋 카야바 쵸에 도장을 마련했습니다. 이것이 후에 대도장으로 성장해서 일세를 풍미 하게 되는 사학관士学館의 시작 입니다. 2대 째 `모모노이 슌조` 때 도장을 `미나미 하치오보리南八丁堀 오토미 쵸大富町 `아시리` 하구 근처로 옮깁니다. 사학관..
북진일도류北辰一刀流 치바 슈우사쿠 의 현무관玄武館 `치바 슈우사쿠千葉周作`는 관정寛正6년(1794) 오우슈奥州 (지금의 미야기 현)에서 태어나 , 아명을 `오토마츠於菟松` 라고 했습니다. 조부인 ‘치바 키치노 조우千葉吉之丞‘는 이와키磐城国 국의 소마 相馬번의 검술사범으로 스스로 유파를 `북진몽상류北辰夢想流(호쿠신 무소류)` 라고 칭했습니다만 , 후에는 의사로 전업합니다. 슈우사쿠의 아버지도 같은 의사 였습니다만 , 집안에 전해지는 검술에 있어서는 뛰어난 기량을 가졌었다 합니다. 슈우사쿠는 후에 , 작은 치바 라고 불리던 남동생 `사다키치定吉` 와 함께 이 아버지로 부터 대대로 이어진 북진몽상류를 배웁니다. 문화文化 6년 (1809) 에 이 부자는 , 에도근교의 `마츠도松戸`로 이사합니다. 슈우사쿠는 이 ..
신류新流의 대두 중세로 부터 후기에 걸쳐서 "죽도대련 검도"가 성행하면서 , 이 기술에 뛰어난 유파가 새롭게 등장합니다. "죽도대련 검술" 의 형태를 만든 `나가누마 시로 자에몬 쿠니사토` 의 지키신카게류直心影流 와 , 이것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를 만들었던 `나카니시中西 파 잇토우류一刀流` 는 그 한 예 입니다. `지키신 카게류直心影流`는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 카시마鹿島의 `마츠모토 비젠노 카미` 와 `카미이즈미 이세노 카미` 로 부터의 흐름을 이어받아 , `쿠니사토`의 아버지인 `야마다 헤이자에몬 미츠노리`를 초대初代로 해서 일으킨 유파 입니다. ‘지키신 카게류`는 `오다니 세이 이치로男谷精一郎` 와 `시마다 토라노 스케`島田虎之助 `사카키바라 켄키치榊原鍵吉` 라는 저명한 검객들을 배출합..
나카니시 츄우죠 츠구타케中西忠蔵子武 로 부터의 보급 ‘지키신 카게류直心影流` 에서 "죽도 대련 케이코" 가 행해지게 되고서 부터 약 50년 후의 보력宝暦 명화明和 년간(1751~1772) 에 이번에는 ‘잇토우류一刀流‘ 의 `나카니시 츄우죠 츠구타케` 가 도구를 보다더 개량해서 "시나이 죽도" 에 의한 케이코를 종래의 형形 케이코에 더하기 시작 했습니다. 당시 , ”시나이 대련 케이코” 에 대해서 찬반 양론이 있었습니다만 이 케이코법의 채용에 대해서는 ‘잇토우류‘ 안에서도 비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노小野파 잇토우류‘ 의 종가도 , 나카니시 츄우죠의 "시나이 대련 케이코" 채용에 비판적 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도구를 착용하고 "시나이" 로 서로 공격하는 이 케이코 법은 시합의 형식으로 행할 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