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구예술론 天狗藝術論.....제 2권(7)..1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다.

어떻게 하면 무예심술이 도학道學의 도움이 되게 할 수 있는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말했다.

마음에는 성性과 정情(마음의 작용)이 있을 뿐이다. 성性은 마음의 본체의 천리 天理(마음의 본체에 본래

갖추어진 자연의 도리)이고 , 조용하고 움직이지 않고 , 색도 없고 형도 없다. 정情의 움직임에 의해 , 바

것과 간사한 것 , 선과 악의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정情의 변화에 의해 일어나는 마음의 본체의 그 신

비한 작용을 보고 ,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이 나누어지는 부분을 아는 것이다. 이것을 학술學術 이라고 한

다. 그러면 그 나누어지는 부분을 아는 것은 ,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원래가 인간의 마음 속에는 본래 뛰어난 판단력이 갖추어져 있어서 , 기만하는 것도 속이는 것도 불가능

한 명쾌한 정신이 존재하는 것으로 , 이것을 지知 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간에서 말하는 소지재각小知才覺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소지小知의 재각才覺은 의意와 식識

의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의意는 마음心의 지각知覺이다. 의意와 식識 이라는 것은 원래가 명쾌한

정신으로 부터 발생하는 것이지만 , 정情의 좋고 싫음의 영향을 받아서 발생하기 때문에 , 의意에도 다시

정사正邪 , 선악善惡이 있다. 그러한 이유로 , 발생에서 부터 호악好惡의 정情을 도와助서 사리私利를 도

하게 된다. 이것을 소지小知 라고 하는 것이다.

자성신명自性神明(사람의 마음에 본래 갖추어진 명쾌한 정신)의 지知는 , 정情의 호악好惡에 상관없이

순수하고 , 그 이성理性이 비추는 곳 일체가 사심私心이 없다. 그 때문에 선악도 없고 , 그저 단지 밝기만

한 것이다. 의意와 식識이 그것에 따라서 사리私利를 꽤하지 않는다면 , 정情의 작용을 잘 억제해서 구

애됨 없이 심체心體의 천칙天則 (마음의 본체에 본래 갖추어진 자연의 법칙)에 따르게 할 수 있다.

정情이 심체의 천칙에 따라서 호악(좋고 싫음)에 구애됨 없이 공포심도 없으면 , 의意와 식識은 명쾌한

신에 조화해서 지知의 작용을 한다. 그와 같은 것이 되면 의意와 식識과의 흔적은 남지 않는다. 이것을

私意無 `사의가 없다 `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 정욕情欲을 도와서 그것을 위해서 기교를 부리고 거짓을 행하고, 여러가지로 변화를 계속시키고 있

을 때는 자신의 마음을 속박하고 , 명쾌한 정신을 가로막아 버린다. 이것을 망심妄心 이라고 하는 것이

다. 범인凡人은 정욕이 마음의 주인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 이 망심 탓에 휘둘리고 , 자신의 정신을 곤혹

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차리지 못한다.

그러한 이유로 학술學術은 , 이 망심의 유혹을 떨쳐버리고 , 자신의 마음의 본체의 천리를 인식하고 명쾌

한 정신을 열어 , 그 천칙天則에 따라서 소지小知에 의한 작위를 사용하는 일 없이 , 재물에 대해서는 재

물의 움직임에 맡기고 재물 때문에 휘둘리거나 하는 일이 없고 , 일의 사정에 대해서는 그것이 도래 到來

하는 것에 맡기고 구求하는 일도 없고 싫어 하는 일도 없다. 그러니까 하루 종일 무엇을 생각해도 , 사심

이 없기 때문에 마음을 번잡하게 하는 일 이 없고 , 또한 하루 종일 일에 몰두하고 있어도 정신적으로 괴

로워 하는 일이 없다. 천명天命에 몸을 맡기고 , 정의正義를 행하는 것에 결심을 굳혀서 의심하는 일도

미혹 되는 일도 없다. 자신의 마음의 성誠을 유지하고 조금도 뜻志을 꺽는 일 없이 , 손해를 피하기 위해

서 교묘함과 위선을 쓰지 않고 , 이익을 얻는 것을 욕심내어 작은 지혜를 쓰거나 하지 않는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살아 있는 것에 맡기고 바른 길을 한결같이 걷고 , 죽을 때가 오면 죽는 것에 맡기고 편안하게

죽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