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검도의 역사...(16)

 

『오륜서五輪書』의 수수께끼

 

『오륜서』는 일본에서 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명 합니다.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의 다섯 권 으로 이루어져 있고 , 상당히 거칠고 다듬지 않은 문장 입니다만 , 실전을 거듭하면서 전장을 뚫고 온 무사시 만의 기술론이 전개되어 있는 박력이 넘치는 전서 입니다.

이 오륜서는 미야모토 무사시가 정보正保 2년(1645)에 완성 했다고 전해 집니다만 실은 무사시 직필의 원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국 진짜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것 입니다. 지금 전해지는 것은 모두가 사본寫本 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오륜서 자체가 무사시의 붓에 의해 씌여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지적 되기 시작했습니다.

『병법삼십오개조兵法三十五箇條』 가 오륜서의 내용의 기본이 되고 있습니다만 , 이것은 무사시가 쓴 것 이라는 것은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기초로 제자나 , 혹은 다른 누군가가 오륜서를 썼는가 ,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태 입니다.

그러나 이유가 어떠하든 오륜서에 쓰여진 내용이 무사시의 기술론 이고 사상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간류지마嚴流島`의 허구

 

미야모토 무사시의 전설 속에서도 역시 클라이 막스는 뭐니해도 역시 `간류지마의 결투` 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 결투는 공식적인 시합 이었습니다. 당시 , `사사키 코지로佐々木小次郎`는 ‘호소카와細川‘ 번藩의 검술사범으로 , 검의 명성이 높아서 「서국西国 제 일」 이라 불리고 있었습니다. 무사시는 번에 자청해서 나아가 , 번주藩主인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忠興‘의 허락을 받고 , 번의 공무원들이 둘러 보는 가운데 ‘코지로‘ 와 결투를 하게 됩니다. 장소는 관문関門 해협(큐슈와 혼슈사이)에 떠 있던 무인도로 , 후에 `간류지마巌流島` 라고 불리게 되는 `후나지마舟島`입니다.

시합 당일 무사시는 약속시간에 많이 늦고도 유유자적하게 나타납니다. 손에는 배의 노를 깍아서 만든 목도를 쥐고 있었습니다. 정각으로 부터 초조에 초조를 거듭하며 기다리던 `코지로`는 무사시의 모습을 보자 마자 덤벼들었고 , 모래사장에서 칼을 빼들고는 칼집을 던져 버립니다.

「코지로는 졌고~」 이기는 몸 이라면 어째서 칼집을 버리는 가 ... 는 무사시의 말 입니다.

승부는 일 순간에 정해 졌습니다. 코지로는 머리 위로 부터 긴 태도太刀들고 베려고 들어옵니다. 무사시가 둘렀던 머리 끈이 잘려나가 , 팔랑~하고 날아 갔습니다. 이겼다고 생각한 그 순간, 코지로의 머리는 무사시의 목검 아래에서 쪼개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일반에게 잘 알려진 간류지마의 결투 장면 입니다.

이 장면으로 부터 , 자주 심리적으로 상대를 뒤흔드는 무사시의 작전승리가 칭송되기도 합니다만 , 당시의 무사武士들의 결투라는 것이 이러한 것 이었을 까요... 특히 무사시가 늦게 나타난 것에 대해서도 의문이 남습니다.

최근 무사시가 늦게 나타난 것에 대해서는 이것이 허구라고 하는 점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 의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蔵』 에 의해서 만들어진 ‘미야모토 무사시` 의 모습은 , 『이천기二天記』 라는 사료의 내용을 참고로 하고 있습니다만 , 이 서적 자체는 무사시의 사후 130년 이나 지난 안영安永5년(1776) 에 쓰여진 것으로 , 이미 이 사료의 내용자체가 픽션 이라고 말해 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무사시의 양자 였던 `이오리伊織`가 , 무사시가 죽고난 후 9년 뒤인 승응承應3년(1654)에 세웠던 `코쿠라 비문小倉碑文`이라는 것이 있습니다만 , 이 석비에 새겨진 문장에는 두 영웅이 동시에 만났다 는 것이 명기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의 신빙성은 높은 편 입니다. 원래가 공무원이 입회하는 공식적인 시합에 늦는다는 것은 당시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무사시가 늦게 나타났다 라는 것은 허구 입니다.

무사시는 무사武士답게 정정 당당하게 싸웠습니다. 여기에는 모략에 의한 병법兵法이 아니라 ,  일본 고래古來로 부터의 무사도武士道가 살아 있다고 말 할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