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八段 선생님들의 시합 이라는 것을 메이지무라明治村 대회에서 처음으로 보았던 것 입니다만 , 검도란 이러한 것 이었던가 라고 깊이 생각하고 알게 되었습니다. 저희들의 검도와는 전혀 다른 것 입니다. 카마에 하고 마주한 모습 , 숨이 막힐 것 같은 간합의 공방 , 그리고 거기로 부터의 타돌 , 그 전부에서 수행의 깊이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쇼와 49년(1974년) 4월 박물관과 함께 메이지 무라( 明治村 )에 이전 해서 지어진 구 제사고등학교 무술도장 舊第四高等學校武術道場 ( 無聲堂 무세이 도우) 에 다시 죽도 소리가 울려 퍼졌다. 메이지 무라의 창립자 이면서 또한 사교四校검도부 출신이기도 한 나고야 철도의 회장 츠치카와 모토오 범사를 추도하는 검도 대회가 개최 되었던 것 이다.
이와이 교사는 말한다.
( 입사 해서 2년째 였다고 기억 합니다. 아이치현과 근처 의 현으로 부터 6,7,8단의 분들이 참가해 주셔서 쿄토대회와 같이 연무형식 으로 행해 졌습니다만 편성 뒤편에는 전년의 각종대회에 있어서 결승전 재현 이라는 특별 시합이 짜여져 있었습니다. 전일본 선수권 , 전국 교직원 대회 개인전 , 전일본 학생 선수권등의 결승 진출자를 초대해서 다시 한번 무성당無聲堂에서 칼을 주고 받도록 한 것 입니다. 전 일본 실업단 대회에 대해서는 , 결승진출 팀으로 부터 한명씩 출전해 받았습니다. 최후의 일전은 역시 전일본선수권 대회 입니다. 쿠마모토의 야마다 선생님과 오사카의 아리마 선생님이 재현 해 주셨습니다. 장내의 열기는 굉장해서 마치 무성당이 크게 몸을 떠는 것 같았습니다. 두 사람의 날카로운 기술의 응수에 관중 누구나가 숨을 죽이고 있었던 것 입니다.)
죽도의 소리가 멈추면 , 이번에는 무성당 안 과 밖에서 일제히 박수가 끓어 올랐습니다. 그것은 관중과 연무자와 관계자가 ,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추도식의 훌륭함에 감동하여 이어서 치고 있는 박수의 폭풍 과도 같았습니다.
이 3년후 쇼와 52년(1977년) 3월 제 1회 메이지 무라 대회( 明治村大會 )가 개최 되었다. 그 전의 추도식이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말 할 필요도 없다.
( 올해로 26회가 됩니다만 다행히도 , 저는 운영위원의 한 사람으로 제1회 대회 부터 계속 관계해 오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 합니다.)
제1회 대회 때 이와이 교사는 26세 였다.
( 이때 8단 선생님의 시합 이라는 것을 처음 보게 되었는데 , 검도라는 것이 이러한 것 이었는가 라고 깊이 생각하고 알게 되었습니다. 컬쳐쇼크 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 였습니다. 저희들의 검도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 이었습니다. 카마에를 취하고 마주한 모습 , 숨이 막힐 듯한 간합의 공방 , 거기 에서의 한 칼의 타돌 , 그 전부에 수행의 깊이가 있다. 이것은 검도 문화의 시범이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 돌며 저는 완전히 흥분해 버렸습니다. 타돌 하나 라고 하더라도 시합,심판 규칙에 규정하고 있는 충실한 기세 , 적정한 자세 , 죽도의 타돌부로 타돌부위를 칼날 과 칼근이 바르게 , 그리고 잔심이 있는 것 , 그 하나하나를 확실히 보고 알수 있는 것 입니다. 저희들의 검도가 단지 빠른 움직임으로 부터 스피드에 의존해서 치고 간다는 것 뿐 이라는 것을 잘 이해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氣로 세메 한다고 하지만 저희들의 경우는 쳐보자 쳐보자 하는 의식이 너무 강해서 대부분 눈 속임 같은 느낌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선생님들은 서로가 상대의 氣를 정면에서 제대로 받아내고 , 그 위에 충분히 서로가 서로를 반죽하듯 개고 , 알맹이와 알맹이를 부딪쳐가며 뜨거운 氣의 싸움을 하고 계신다. 타돌에 앞서 긴 氣의 상호 세메가 있는 것 입니다. 저희들 과는 근본에서 부터 큰 차이가 있다... 그렇게 느꼈습니다. 추구 해야 할 것은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과 같은 검도다 , 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검도관이 완전히 바뀌었다.
( 그렇지요. 하지만 추구 한다고 해도 남들 정도의 노력으로는 아무래도 불가능 합니다. 거기에 자신의 능력문제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50대가 되었을 때도 선생님들과 같은 검도가 과연 가능할까 라고도 생각했습니다. 한편 앞으로도 계속 검도를 해 나 간다면 , 이 부분은 역시 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강한 기분이 든 것도 사실 입니다.
반쯤은 무리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만 .....(웃음)
그리고 ( 하나더 .....) 라고 이와이 교사는 말한다.
( 메이지 무라대회에 관계 하면서 하나 더 배운게 있습니다. `모습 姿` 입니다. 선생님들 에게는 각각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적인 모습이 있는것 같은 느낌 이었습니다. 상대와 견주어 가며 뜨겁게 氣의 싸움을 한다. 거기에 그 선생님의 속에 있는 모습이 보였던 것 입니다. 수행의 깊이에서 자연히 스며 나오는 것 입니다. 저희들은 외면적인 모습은 만들 수 있어도 내면적인 모습은 나오지 않습니다. 결국 내면적인 모습과 외면적인 모습이 겹쳐졌을 때 비로소 , 거기에 그 개인 개인의 진정한 모습이 있다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 진정한 모습이 더욱 더 연마되어 졌을때 , 저절로 氣位 ,氣品이 나오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속內의 모습이 얼마나 중요한가 , 이것은 저에게 큰 의미를 가지는 학습 이었습니다. 氣品이라고 한다면 노다 선생님과 호리구치 선생님 ,타마카키 선생님 에게 서는 `아우라` 와도 비슷한 그런 것을 항상 느끼고 있었습니다. 노다 선생님은 한큐백화점의 회장님을 하시면서 하세가와 에이신 流의 거합을 자주 뽑으시곤 했습니다.
그 거합도 그렇습니다만 , 서 계시고 움직이시는 전부가 기품에 넘치고 있었습니다. 호리구치 선생님과 타마카키 선생님은 매년 7월즈음 기획한 호우라이 지잔 ( 鳳來寺山 ) 의 연수회에서 케이코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만 , 도장에 서 계시는 모습 만이 아니라 , 아무렇지도 않은 동작 , 말씀 하시는 어투등에 기품이 있었습니다.
( 호리구치 선생님은 낚시를 좋아 하셔서 , 아침 케이코후에 저희들을 데리고 근처의 강川으로 자주 가시곤 했습니다.
은어 낚시 입니다. 점심 시간을 보아서 저희들이 식사를 가지고 갑니다만 , 선생님의 낚시를 하시는 모습은 도장에서의 모습 그 모습 그대로 였습니다. 강川에 들어 가셔서 낚싯대를 쥐신 모습이 기품으로 넘쳐 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눈에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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