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구예술론天狗藝術論.....제 1권(10)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다.

그러면 나와 같은 사람이 수행해서 얻을 수 있는 길道이 아닌 것인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말했다.

어째서 얻지 못하는 일이 있을 것인가. 배워서 성인聖人이 되는 것도 가능하다. 어째서 하나의 기예技藝

지나지 않는 검술로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 있겠는가. 원래 검술劍術이란 , 그 대부분이 기氣의 수련인

이다. 그래서 초심자에게는 기술의 단련에 의해서 기氣를 수련시키는 것이다. 초심자 시절부터 기술과

떨어져 기氣를 수련시키려고 해도 , 손에 잡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수련 할 방법이 없다.

기 氣를 수련해서 습숙하면 , 마음의 문제에 다다르게 된다. 그때까지의 시간이 빠른가 늦는가의 차이는

있지만 , 그것은 각자의 성질의 영리함 우둔함에 따른 것 일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신비한 작용을 아는

것은 쉽게 될지 모르지만 , 자신의 마음을 철저히 파악해서 변화자재가 되는 것은 어렵다.

검술은 생사를 가르는 싸움에서 사용하는 재주術 이다. 그러니까 생을 버리고 죽을 각오로 싸우는 것은

쉽지만 , 생사를 두 가지로 나누지 말고 같은 것으로 의식하고 싸우는 것은 어렵다. 생사를 두개의 각각

으로 의식하지 않고 , 동일 한 것으로 의식하는 사람이 자재의 움직임을 하는 것 일 것이다.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다.

그렇다면 선승禪僧으로 생사生死를 초월한 사람은 , 검술에서도 자재의 움직임이 가능한 것인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말했다.

검술劍術과 선종禪宗은 수행의 취지가 다르다. 선승은 윤회輪廻를 싫어하고 , 적멸寂滅의 깨달음을

구해서 , 처음부터 죽었다는 생각으로 있기때문에 생사의 관념을 탈각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선승은 , 많

은 적들에게 포위되어 그 몸이 먼지와 가루가 되도록 부서진다 해도 , 조금도 마음을 동動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 살기 위해서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다만 죽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는 것 뿐이다. 성인사생일관 聖人死生一貫 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과는 다르고 , 성인은 살아있는 경우에

는 살아 있는 것에 맡기고 , 죽는 경우에는 죽는 것에 맡기고 , 생사에 따라 마음을 두 갈래로 나누지 않

고 , 단지 다만 사람이 행해야 할 정의正義가 있는 곳을 추구하고 그 길道을 끝까지 다 할 따름인 것

다. 그리고 길道 다했極을 때 자유자재自在가 되는 것이다.

 

*적멸寂滅 : 번뇌의 헤매임에서 멀어져 깨달음을 얻고 , 윤회에서 벗어나 영원의 사후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