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검도의 역사...(12)

 

철포鐵砲를 버린 일본인

 

그러나 일본인은 철포를 무기 이상으로 신성시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무기라고 해도 이것을 가지고 소중한 몸을 지키는 것으로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근세기 이후 , 무사는 이것의 사용을 포기해 갑니다.

당시 일본인이 철포를 포기한 것에 대해서 , 노엘 페린(Noel Perrin) 이라는 사람이 『철포를 버린 일본인』 이라는 책 속에서 , 재미난 부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본래 , 무사는 얼마나 뛰어나게 단련되어 졌는가를 합전合戰을 하면서 서로 겨루어 왔습니다. 단련이 완벽하게 된 결과로 , 기사騎射의 기술에 뛰어났던 무장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영웅 이었던 것 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당시의 전쟁에서 철포를 쓴 것은 , `아시가루(足輕)` 라 불리는 하급무사 였습니다. 철포가 무기로서 우수했던 탓에 , 쓰는 사람의 기량은 그다지 문제가 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결과 , 일개의 하급무사가 쏜 그저 한 발의 탄환이 최강이라고 불리던 무사를 너무나도 간단히 공격하고 죽이는 일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 입니다. 이러한 것을 일본의 무사들은 싫어 했다는 것 입니다.

원래가 전쟁은 단순한 서로 죽이기 가 아니라 , 뛰어나게 단련한 무사들끼리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싸운다고 하는 룰 속에서 행해져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싸움의 한 가운데서 서로 이름을 큰 소리로 밝히고 목숨을 걸고 역량을 겨루었던 `잇키우치`가 최고의 명예이기도 했던 것 입니다.

무사에게는 싸움 속에서의 미학美學이 있었다는 것  입니다. 이것이 무사도武士道 라고 불리는 것의 원점이기도 합니다.

일본의 무사도武士道가 일본인으로 하여금 철포를 버리게 했다고 말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본도日本刀를 주역으로 밀어올린 일본의 정신精神

 

그러면 철포를 버린 일본인은 무엇에게 무武의 주역을 맡게 했는가 하면 , 그것은 일본도 입니다. 에도시대는 검술을 무예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정착해 있었습니다.

원래가 왜 일본인이 철포를 버렸는가 하는 , 노엘 페린의 지적은 그 당시 초기의 무사도 사상으로 부터 유추해 보자면 틀리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철포를 하급무사가 아니라 무장武將이 사용해도 괜찮았을 것 입니다. 영웅이라 불리던 무사가 철포의 기술을 철저히 수련해 두어도 이상할 것은 없었습니다만 , 역사 속에서는 그렇게는 되지 않습니다. 무사의 의식은 일본도로 옮겨져 가고 있었던 것 입니다. 그것은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철포가 무사에게 있어서 정신적인 근간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비해서 일본도日本刀는 `코가라스 마루(小烏丸)`의 예로부터도 알수 있듯이 중세 무가사회에 있어서 이미 그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있었습니다.

근세는 기본적으로 평화로운 시대 라고는 하나 , 무술자체가 생사의 경계를 전제로 하고 있는 만큼 , 무기로서의 실용성은 물론이고 정신적인 면에서의 효용이라는 것도 중요했을 것 입니다.

 그러면 왜 , 일본도가 무사의 정신적인 면에 작용할 수 있었는가 하면 , 하나는 일본도는 단순한 무기로서가 아니라 , 이것을 연마하고 완성해서 거기에 마음을 깊이 비추어 보고 , 혹은 거기에서 신神의 존재 조차 느껴온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도검刀劍이 이러한 상징적인 의미를 가졌다는 것은 노엘 페린도 지적한 바가 있습니다.

철포에는 그러한 감각이 없습니다. 단순한 무기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 입니다.

나아가 하나 더 중요한 것은 , 일본도가 탄생하기 전 부터 도검刀劍에 대한 신화가 있었다는 것 입니다. 도검을 신성한 것으로서 이야기 해 온 신화가 있었던 까닭 입니다. 일본인에게 있어서의 신화의 힘은 , 말로 할 수 없는 굉장함 처연함이 있습니다. 긴 역사를 되돌아 보면 분명해 집니다만 , 일본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신기한 힘이 있습니다. 철포에는 그것이 없습니다.

일본인이 철포를 버리고 무武의 주역을 일본도로 옮긴 그 가장 큰 이유는 , 철포에는 신화가 없고 도검에는 신화가 있었다는 것이 아닐지요.

일본정신의 깊은 곳에 뿌리내린 , 역사의 변천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부터 일본도의 시대 , 검술의 전성기가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