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日本剣道の歴史 일본검도의 역사

일본 검도의 역사...(35)

 

15 . 쇼와시대의 검도

 

쇼와 천람시합天覧試合

 

쇼와의 검도는 처음부터 크게 융성하는 양상을 띱니다. 그 상징적인 사건이 쇼와에 들어서 세 번나 치루어진 천람무도대회天覽武道大會(천황이 관전하는 시합) 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회째는 쇼와천황의 즉위를 기념해서 쇼와4년(1929) 5월 4일 과 5일에 , 궁성내의 `산노마루 오오이노바바` 및 `사이네이칸` 에서 행해 졌습니다 , 어대례기념御大禮記念 쇼와 천람무도대회 입니다. 궁내성이 전문가들 속에서 지정한 지정선사指定選士 의 부와 각 부현府縣의 예선을 이기고 올라온 부현선사府縣選士의 부 두 개로 나누어 시합이 치뤄졌습니다. 이때 지정선사의 부에서 우승한 것이 , 쇼와의 검성劍聖이라 불리던 `모찌다 모리지持田盛二`(조선총독부 경무국사범...저도 이제 안 사실입니다^^;)선생 입니다. 대회의 규모나 참가자의 면목부터 실력까지 무도의 역사상 공전의 대회였다고 전해 집니다.

2 회째는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해서 , 쇼와9년(1934) 5월 4일 , 5일에 걸쳐서 `사이네이칸` 에서 치뤄졌던 황태자 탄생 봉축 쇼와 천람무도대회 입니다.

그리고 3 회째는 황기皇紀 2600년을 기념해서 쇼와15년(1940) 6월 18일 부터 20일까지 3일간 , 같은 사이네이칸 에서 치뤄진 기원2600년 봉축 쇼와 천람무도대회 입니다. 이 대회는 일본전체에 전시戰時분위기가 확산되고 무도가 이것에 크게 휘말려 들어가는 중에 치뤄진 것으로 , 국민상무의 정신을 고양하는 것이 최대의 목적이기도 했습니다.

 

 

전시하戰時下의 검도

 

쇼와10년대(1930년 후반)에 있어서 검도를 둘러싼 상황은 전시의 색체를 땐 면이 강합니다. 일중日中 전쟁의 발단이 된 쇼와12년(1937) 의 노구교盧溝橋사건 이후 , 일본과 청나라 전체가 군국주의로 크게 기울었고 쇼와16년(1941) 12월 8일 , 드디어 태평양 전쟁으로 돌입하게 됩니다.

검도에도 전장에서의 실전성이 요구되어 건물 밖에서의 시합 등의 필요성이 거론되기 시작합니다.

전시 체제하에 있어서 개조된 대일본 무덕회도 진검승부를 의식해서 실전적인 것에 가까워지도록 하기위한 의도에서 3판 승부를 한판 승부로 , 죽도의 길이를 3척8촌(115cm)에서 3척6촌(109cm) 로 , 보다 진검에 가깝게 시합심판 규정이 바뀌게 됩디다.

또한 학교교육에 있어서도 국민학교에서 체력단련 무도가 필수화 되는 등 , 검도는 전시하에 있어서도 필요한 심신의 단련을 위한 의무교재가 됩니다.

그러나 죽도검도가 정말로 실전에서 유효한 가에 대한 의논도 되고 있었던 모양 입니다. 중화기가 주류를 이루는 근대전에 있어서 죽도검도가 전장에서 유효한 기능을 한다고는 생각하기 어렵고 , 오히려 전시하게 있었던 일본인에게 정신적인 면에 기여하는 부분이 컸던 것은 아닐까요.

태평양 전쟁때 최후의 육군대신 이었던 `아나미 고레치카阿南惟幾` 대장은 종전의 날에 전쟁의 책임으로 「나 하나의 목숨을 끊는 것으로 이 전쟁의 큰 죄를 사죄하고 이에 바친다」 의 말을 남기고 할복자살을 합니다만 , 그 이틀 전에 당시 육군사관학교와 육군성 등에서 검도를 가르치고 있던 `사이무라 고로斎村五郎` 범사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검도의 케이코를 했다고 합니다. 검도케이코를 하는 것으로 스스로가 마음의 정리를 했는지도 모릅니다. 가까운 근대의 일이라 너무 생생해서 언급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습니다만 , 전시 하에 있어서 검도를 생각하는 중요한 사건 이었다는 것은 말 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