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검도의 역사...(33)

 

14 . 근대 검도의 발자취

 

경찰검도의 시작

 

메이지 유신에 의해 위기적 상황에 있었던 검도가 다시금 성행하게 되기 까지는 ,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계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이것은 메이지10년(1877)에 일어난 `세이난西南 전쟁` 에서의 경찰청 발도대拔刀隊의 활약 입니다. 메이지 신정부의 급격한 변혁에 불만을 가졌던 사무라이 들은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킵니다만 , 카고시마鹿児島 무사들이 정부를 물러난 ‘사이고 타카모리‘를 옹립해서 일으킨 최대의 난이 `세이난의 변` 입니다. 검술에 뛰어난 이들을 선발해서 결성된 발도대의 ‘타바루자카田原坂(세이난 전쟁의 격전지 , 지금의 쿠마모토 현)‘ 에서의 활약은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봐야 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고 전합니다.

당시의 경시청 대경시 였던 `카와지 토시요시川路利良`는 이것을 계기로 순사巡査의 육성을 위해서 검술을 필요성을 주장하기에 이르렀고 , 여기에서 경찰검도가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공적기관에서 검도가 정식으로 장려되게 된 것은 그 후의 검도사에 있어서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습니다.

지도 진으로는 , `카지카와 요시마사梶川義正` , `우에다 우마노스케上田馬之助` , `헨미 소우스케逸見宗助` 로 이어지는 일류의 검술가들이 모두 얼굴을 모았습니다.

경시청의 검술에 있어서 특히 기록해야 할 것은 , 경시청류警視庁流의 형形을 제정했다는 것 입니다. 조직으로서 검술을 지도하고자 하면 획일적인 지도가 필요하고 , 그 때문에 통일된 형形이 필요 했을 것 입니다. 이 형形은 열 본十本으로 이루어져 , `지키신 카게류直心影流` , 쿠마류鞍馬流 , 츠츠미 호우젠류堤宝山流 , 타츠미류立身流 , 호쿠신 잇토우류北辰一刀流 , 아사야마 이치덴류浅山一伝流 , 지겐류示現流 , 신토우 무넨류神道無念流 , 야규류柳生流 , 쿄우신 메이치류鏡心明智流 의 각각의 유파로 부터 기술을 선별하여 만들어 졌습니다. 검술에 있어서 유파의 통일이 보다 앞당겨지고 나아졌다고 말 할 수 있겠지요.

 

 

대일본 무덕회武德会의 설립

 

메이지27년(1894)에 발발한 일청日淸전쟁은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시켰고 , 상무尙武의 기풍을 높이게 됩니다. 시대는 일변했고 무도에 있어서는 이것이 순풍으로 작용합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칸무桓武천황이 나라奈良에서 쿄토京都로 도읍을 옮기고 1100년 째를 맞아서 이를 기념하는 사업이 벌어졌습니다. 칸무천황은 무武의 덕德으로 세상을 다스렸다고 전해 집니다. 이것을 기회로 메이지28년(1895) , 무술의 장려 , 보급 , 지도 , 대회의 개최 , 무술가의 표창 등을 행하는 전국적인 조직으로서 , 대일본 무덕회가 설립됩니다.

메이지28년 10월 25일 제 1회 무덕제武德祭가 개최되고 , 이후 매년 열리게 되었습니다. 메이지32년(1899)에 무덕전武德殿이 완성되면서 무덕제는 칸무천황의 유지를 받들어 5월에 열리도록 하게 됩니다. 도중에 중단되기도 했습니다만 현재 매년 쿄토에서 열리고 있는 연무대회가 이 갈래 입니다.

무덕회에 있어서 검도의 보급발전을 위해서는 통일된 형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 `와타나베 노보루渡辺昇`를 필두로 7명의 위원으로 검토를 거듭하여 , 메이지39년(1906) 에 `대일본무덕회 검술형`이 제정되었습니다. 이것은 천 , 지 , 인 天 地 人의 세 가지 본으로 이루어진 형形 입니다만 , 여러가지 제반 사정과 검술가들 사이에서도 불평이 있어서 전국적으로 보급하는데 까지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거기에서 재차 , `나이토 타카하루内藤高治 , 타카노 사사부로高野佐三郎 , 네기시 신고로根岸信五郎 , 쯔지 신페이辻真平 , 몬나 타다시門奈正 가 주위원이 되어 통일된 형形의 검토가 이루어지고 , 타이쇼大正원년(1912)에 대일본제국 검도형이 제정 되었습니다. 이것은 태도太刀형 7본 , 소도형小刀形 3본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현재 일본검도형으로 정착되어 갑니다.

여기에서 현대로 이어지는 유파의 통일이 거의 완료되었다고 말 할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