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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剣道の歴史 일본검도의 역사

일본 검도의 역사...(34)

 

 

무술전문 학교의 창설

 

대일본 무덕회는 무술교원을 양성할 필요성에서 메이지 38년(1905) 무술교원 양성소를 개설 했습니다. 이것이 메이지44년(1911) 에 무덕학교가 되고 , 다음해 메이지45년에 무술 전문학교가 됩니다.

검도는`나이토 타카하루内藤高治` 가 주임 교수를 맡고 , 대련 , 연격 , 전공 등의 기본케이코를 철저히 해서 행하게 했다고 전하는데 , 그 엄격함은 현재에도 이어져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독한 케이코로 유명한 , 「무전武傳」 이라 불리는 무술의 전문가를 양성하는 기관 입니다.

현재에는 , 무술武術이나 무예武藝를 무도武道라고 말하고 , 검술劍術을 검도劍道라고 말합니다만 , 이것이 언제부터 이렇게 불리게 되었는지 의문을 가졌던 분들도 많았을 것 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무술전문학교에서는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타이쇼大正8년(1919) 에 `니시쿠보 히로미치西久保弘道` 라는 인물이 대일본무덕회 부회장겸 교장으로서 무술전문학교에 부임합니다. `니시쿠보`는 , 케이코稽古는 신성한 것으로 무武는 술術이 아니라 도道라고 하는 강한 신념을 가졌던 인물 이었습니다. 그는 이 개인적인 생각으로 부터 「유술 , 검술 , 궁술」 의 명칭을 「유도 , 검도 , 궁도」로 변경하고 이것들의 총칭으로서 「무도武道」 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학교명을 「무술전문 학교」에서 「무도전문 학교」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여러 설에 따르면 이 것이 「검도」 혹은 각 종목의 총칭으로서 「무도武道」 라는 말이 사용되게 된 계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후에 교육상의 표기도 이와 같이 하게 됩니다.

 

 

교육검도의 계보

 

무도의 근 현대사회에 있어서 존재의의 라는 것은 , 하나로 말하자면 교육적인 효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이 아니면 죽도로 서로 두드리고 , 유도라면 상대를 던지고 , 때로는 서로 목을 조르는 기술까지 사용하는 운동경기가 사람들에게 널리 인지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육자로서 무도의 교재로서의 가치를 강하게 주장 한 것은 `카노 지고로嘉納治五郎` 입니다. 이후 무도는 `카노`가 창시한 유도가 주장하는 형태로 지금에 까지 이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무술武術」 이 아니라 「무도武道」 라는 말이 사회적으로 인식되게 된 것도 , 1882년 그가 세운 강도관講道館에서도 「술」 이 아니라 「도」 를 강조하고 「유도」 라고 한 `카노 지고로`의 영향도 생각해 볼 수 있으나 분명한 것은 아닙니다.

무도武道가 학교교육의 하나로 정과로서 편입되기 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메이지16년(1883)에 문부성은 체조전습소體操傳習所에 대해서 검술이나 유술이 체육상 적당한가 어떠한가 에 대해서 조사를 의뢰 합니다. 그 대답은 , 위험 , 조폭 하고 , 또한 일제히 지도하는 것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학교교육의 정과로서 채용하기에는 맞지 않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 후에 여러가지 다양한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무도가 정과목에 편입 될 수 있었던 것이 메이지 44년(1911) 이 되고 나서 부터 입니다.

학교교육에 있어서 정과正課로서 다루어지기 위해서는 당연히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대일본 무덕회에 무술전문학교가 창설된 것도 그 이유 입니다. 당시 다르게 무술의 교원을 양성했던 곳이 동경고등사범학교 東京高等師範學校입니다. 메이지26년(1893) 부터 학장에 취임한 `카노 지고로`가 전력을 다한 노력도 있고해서 , 동경고등사범학교에서는 타이쇼 시대(1912~1926)가 되면서 부터 무술교원양성을 개시 하게 됩니다. 검도주임 교수가 된 `타카노 사사부로高野佐三郎`는 교사로서 가르치기 쉽고 학생으로서 배우기 쉽도록 연구를 거듭해서 `동경고사오행지형東京高師五行之形`을 만들어 냅니다. 태도형太刀形 5본 , 소태도형小太刀形 3본으로 구성된 것으로 , 둥글게 모나지 않고 , 부드러우면서 속에는 강한 것을 포함한 , 장중하면서도 박력이 있는 움직임이 이 형形의 특징입니다.( 동경고등사범학교는 그후에 동경교육대학 , 츠쿠바 대학으로 이어진다)

이어서 쇼와昭和4년(1929) 에 현재의 국사관대학의 전신으로 국사관전문학교가 설립됩니다.

이러한 전문가양성기관으로 부터 많은 지도자가 배출되고 교육계에 있어서도 검도의 기초를 다져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