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검도의 역사...(23)

 

10 . 죽도 대련 검술의 시작

 

형形 검술의  교착점

 

에도시대의 시작 , 검술은 전국난세의 실전경험을 풍부하게 가진 검호들의 기술을 , 살상성殺傷性을 배제하기 위해서 형形에 의해 케이코 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설명 했습니다. 또한 미야모토 무사시도 중요시하고 야규 무네노리 등에 의해서 구축되어진 고도의 심법心法 (마음의 궁리) 도 , 이 형形의 틀 안에서 수련되어 졌습니다. 형形 검술劍術은 기본적으로 평화로운 시대로 역사가 대변혁을 이루는 속에서 검술의 명맥이 분명하게 지켜져 왔다는 점에서 중대한 역할을 담당 했었다고 말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세상의 정세는 서서히 안정되고 검술의 유조流祖가 활동하던 시대와 같은 실용성은 옅어져 갑니다. 나아가 막부가 타류시합을 금지 하는 등 , 검술에는 이미 목숨을 걸고 주고 받는 공방攻防 이라는 긴박한 장면은 거의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평화를 향유하던 무사들은 연약해져 갔고 , 당연한 귀결로서 형形 검술도 , 생명이 걸린 생사의 경계에서 사용하는 기술을 형形의 틀 안에서 철저히 해서 수련한다는 식 이었으니 , 결국 겉 모습의 보기좋은 면도 추구해 가야 하는 것으로 변질해 갑니다.

목적에는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고 , 자기자신의 문제라기 보다는 오히려 밖을 향한 , 보여주기 위한 연기한다 는 성격으로 변해 갑니다. 이것을 화법검술華法劍術 이라고 합니다.

또한 원래가 형形 검술은 약속을 하고 서로 행하는 것이니 만큼 , 실전에서는 적의 자재로운 칼끝에 대응하기 어렵다는 근본적인 결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용의 검술을 진지하게 고민 하고 있었던 뜻이 높았던 사람들은 , 이 형形 케이코의 교착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 입니다. 여기에서 갑자기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 "시나이 죽도" 입니다.

 

"시나이"의 발명

 

형形이 아니라 "죽도 시나이"를 사용해서 자유롭게 서로 타격하는 "죽도 대련 케이코"가 널리 행해지게 된것은 에도시대 중기 이후 입니다만 , 실은 "죽도 , 시나이"의 역사는 훨씬 더 오래된 것 입니다.

"시나이 죽도"를 발명한 것은 , `신카게류新陰流`를 창시한 `카미이즈미 이세노 카미上泉伊勢守` 라고 말해 집니다. `카미이즈미上泉‘의 제자인 `히키타 분고로疋田豊五郎‘ 도 이 `죽도` 를 가지고 여러 나라를 돌며 수행 했다고 전해 집니다.

이 "시나이" 는 현재의 검도에서 사용되고 있는 네 조각으로 나눈 대나무에 병혁을 씌워서 끼워맞춘 것이 아니라 , "주머니 죽도 袋しない" 라고 하는 것으로 , 손잡이 부분은 통 대나무 그 대로하고 , 끝부분을 가늘게 쪼개서 솔과 같이 만든것으로 주머니 형태의 가죽을 덮어 씌운 것 이었습니다. 덮어 씌운 가죽이 살갗에 닿는 느낌이 두꺼비의 등 껍질과 비슷하다 고 해서 "히키하다蟇肌 시나이" 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 "주머니 죽도"라면 , 진짜로 치고 받는 시합을 하더라도 상처를 입는 일은 적었을 것이고 , 하물며 어느 쪽이 죽거나 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을 것 입니다.

후에 융성을 거듭하는 `야규 신카게류柳生新陰流(야규 가문에 전해져 온 `신카게류新陰流`의 속칭 , 정식명칭은 신카게류新陰流)` 를 창시한 `야규 무네요시柳生宗厳`는 , `카미이즈미 이세노 카미` 와 시합을 하고 그 압도적인 강함에 완전히 패해서 그 자리에서 제자로 들어 갑니다만 , 이 때에 ‘카미이즈미` 가 사용한 것이 "주머니 죽도" 였다고 전해 집니다.

이 후 , 야규 신카게류를 시작으로 `타이샤류タイ捨流` 와 `히키타 카게류疋田陰流` 등 , 신카게류 계통에서는 일찍부터 `주머니 죽도`가 사용되어 졌습니다.

그러나 에도시대 초기 , 당시 미야모토 무사시와 같이 이 "주머니 죽도" 를 비판하는 이들도 있어서 , 이것이 일반화 되기 까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