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輪書오륜서 탐구...水의 卷(5)

 

*무사시의 냉정함이 잘 나타나있는 부분이다. 합리적인 무사시로는 당연한 것이겠지만 태도太刀는 원

래부터가 사람을 베는 도구이고 , 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五輪書』 와 같은 시기(1632)에 기록된

쇼군가의 사범역이었던 야규家의 『兵法家傳書』 등 에서는 , 이 사람을 벤다 라는 것에 , 이래저래 변명

을 쓰고 있다. 다시말해 , 한 사람의 악惡을 죽여서 만인의 선善을 살릴 수 있다면 , 이것은 실로 하늘의

도道를 따르는 것이다 , 라고 , 그러나 , 사람을 죽이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 사람을 베는 것이 나쁘다

라고 하는 것은 , 어떨까 .. 물론 그것은 비유적인 의미에서 일 것이다.

어쨌든 지금은 , 많은 사람들과 잘 해나가는 것 만이 칭찬받고 , 그러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 냉정히 말

하자면 , 쓸모없는 사람 , 있어서는 안되는 인물도 있다. 잘 풀리고 있을 때는 지인知人은 저절로 찾아오

는 법이고 , 잘 안되면 , 지인은 저절로 사라져 가는 법이다. 지인知人이라도 거리가 필요한 것이고 , 많

은 지인 보다는 제대로 된 지인 이야말로 소중한 것이라면 , 많은 지인을 가지기 위해서 제대로 된 지인

을 잃는것 만큼 바보 같은 짓은 없다. 원래가 , 잘 풀리고 있을때 말을 걸며 다가오는 지인 따위는 , 실제

는 대부분이 나에게 의지하고 들러붙는 무거운 짐에 지나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결코 얽혀서는 안되는

무리도 있다. 이와 같은 무거운짐이 되고 악연이 되는 사람들은 , 냉정히 잘라 버리는 것 만이 , 진정으

로 확실한 친구를 소중히 하는 바른 길이 아니겠는가 . 게다가  , 사람을 얻고도 나를 잃어버려서는 , 뿌

리도 가지도 있을 리가 없다.

그러니 무사시의 냉정함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선악善惡은 오로지 `무엇을 베는가` 에만 달려있

다. 그러니 때로는 이 냉정함만이 , 인연을 자르는 자비심이 되기도 한다. 크게 넓게 뜬 눈으로 보자면

큰 줄기를 곧 바르게 펴기 위해서는 자르지 않으면 안되는 가지와 잎도 있다. 하물며 , 눈앞의 상황이

라는 것은 , 고여서 썩어있는 물이고 , 죽이기도 전에 죽어 있다. 그리고 썩은 물을 그대로 두면 , 많은

중생까지도 그 물에 고통받게 된다.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 썩어서 쓸모없는 대목을 자르고 , 살아있

는 어린 잎을 구하는 것이야말로 , 오늘에 이기고 , 내일을 개척하는 무사武士의 고독한 책무인 것이다.

그래서 「귀신鬼」이라고 불릴 지언정 , 그것이야 말로 진정 「부처佛」의 태도太刀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부처의 칼 인가 아니면 귀신의 칼 인가는 , 칼을 쥐기 전에 숙고 해 두어야 할 문제이다.

`벤다`고 생각하고 칼을 쥔다 , 라고 하는 것은 , 오히려 흔들림이 아직 있는 동안에는 , 칼을 쥐어서는

안된다 라는 것이다. 마음의 흔들림은 몸을 멈추게한다. 한 곳에 멈추는 것은 자신의 리듬을 잃는 것

이다. 이래서는 칼을 쥔다고 해도 이기지는 못한다. 이기지 못하는 칼이란 , 자신을 베고 , 세상을 무

너뜨리는 칼일 뿐이다. 원래가 자기자신의 힘을 가지지 못하고 , 진정한 세상의 도리를 벗어나서 이

길수 있는 칼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아가 또한 , 무사시의 논술에 있어서 태도太刀는 어디까지나 도구의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잊

어서는 안된다. 사람을 벤다는 것은 좋은 것도 나쁜것도 없고 , 단지 그것이 칼의 본래 모습이고 , 그

본래의 모습을 잊어서는 안된다 라고 하는 것 만이 , 그에게 있어서는 문제였던 것이고 , 무사시가 싫

어했던 것은 , 도구나 기술이나 인간이 그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 지금은

본래를 의미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많지 않은가 . 가령 , 가까운 예를 들어보면 , 파티 라는

모임은 식사를 하는 장소가 아니라 환담의 장소이고 , 스피치 연설은 , 재미난 이야기를 하는 기회가 아

니라 함께 공응하는 기회이다 라고 하는 기본적인것 조차 알고 있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을 것이다. 파티에 간다면 , 반드시 , 사람들과 환담하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출석해야 하고 , 연

설을 한다면 , 반드시 , 이야기기로 함께 응하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등장해야 할 것이다.

`무엇을 하는가 ` 하는 확고한 각오가 최초에 없으니까 , 눈 앞의 것에 끌려가서 도중에는 뜻도 모르게

되고 실패하고 만다. 그래서는 개나 고양이나 소 돼지와 다를바가 없다.

 

 

※ 번역하면서 간간이 언급하는 이 분의 직설적인 사견에 웃음이 납니다. ^^

   한 사람의 생각이니 재미있게 읽으시면 됩니다. 굉장히 고집이 센 분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