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 근대 검도의 발자취 경찰검도의 시작 메이지 유신에 의해 위기적 상황에 있었던 검도가 다시금 성행하게 되기 까지는 ,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계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이것은 메이지10년(1877)에 일어난 `세이난西南 전쟁` 에서의 경찰청 발도대拔刀隊의 활약 입니다. 메이지 신정부의 급격한 변혁에 불만을 가졌던 사무라이 들은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킵니다만 , 카고시마鹿児島 무사들이 정부를 물러난 ‘사이고 타카모리‘를 옹립해서 일으킨 최대의 난이 `세이난의 변` 입니다. 검술에 뛰어난 이들을 선발해서 결성된 발도대의 ‘타바루자카田原坂(세이난 전쟁의 격전지 , 지금의 쿠마모토 현)‘ 에서의 활약은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봐야 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고 전합니다. 당시의 경시청 대경시 였던 `카와지 토시..
야마오카 텟슈山岡鉄周 와 수양검도修養劍道 한 사람 더 , 이 시기에 검도의 전통을 이으며 ,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인물로 , 야마오카 텟슈(1836~1888) 를 들지 않을 수 없겠지요. 야마오카 텟슈는 막부 말에 무력에 의한 막부 타도를 도모하고 있던 사츠마薩摩 번의 사이고 타카모리 西郷隆盛와 반대 편에 서서 , 에도(지금의 토쿄) 로의 공격을 저지하고 , 무혈의 상태로 대정봉환을 달성시킨 영웅 입니다. 또한 유신이후는 메이지 천황의 시종을 맡아서 천황의 아래로는 그 누구에게도 비길때 없는 신용을 얻은 인물이기도 합니다. 몸집이 크고 호쾌한 무인武人 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그는 , 대주대식大酒大食 등의 많은 일화가 전해 지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철저히 끝까지 하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았다는 성격..
13 . 근대의 개막 메이지 유신과 무도의 위기 막부 말로 부터 명치시대에 걸쳐 검도를 시작으로 무도를 둘러싼 사회정세는 격변을 맞이 합니다. 막부는 페리의 강경한 개국요구에 응해서 안정安政 원년(1854)에 일미화친조약을 체결 합니다. 이어서 영국 러시아 네델란드 등과도 조약을 체결하고 200년 이상 이어진 쇄국체제에 종지부를 찍습니다. 오랜시간에 걸쳐서 외국과의 접촉을 끊어온 일본인에게 있어서 이 급변하는 변화는 외국인 배척(양이) 운동이 격화하는 등 큰 혼란을 부르며 이것이 막부를 타도하자는 운동에 까지 발전해 갔습니다. 쵸슈長州 번의 `타카스키 신사쿠高杉晋作` 와 `카츠라 코고로우桂小五郎` , 사츠마薩摩 번의 `사이고 타카모리西郷隆盛` , `오오쿠보 토시미치大久保利通` , 토사土佐 번의 `사카모토..
강무소講武所에 의한 죽도의 규정과 유파검술의 통일 막부 말이 되면 검술은 새로운 단계를 맞이 하게 됩니다. 가영嘉永6년(1853) 6월 , 아메리카 동인도 함대 사령장관 페리의 내항사건에서 대표되는 것 처럼 해외열강으로 부터의 압력이 강해지자 군비의 충실을 재촉 당하게 된 막부는 안정安政3년(1856) 늦은 감은 있었지만 강무소를 설립 하였습니다. 강무소에서는 검술 창술 포술 을 중심으로 한 교습이 행해졌습니다. 강무소 최고 책임자로 임명되어 검술부분의 사실상 최고의 자리에 이른 것은 , 장죽도를 사용한 오오이시 스스무 와 맞서 싸운 `오타니 세이 이치로男谷精一郎` 였습니다. ‘오타니‘는 실용적인 관점에서 죽도의 길이를 3척8촌(117.3cm) 으로 정했습니다. 이 길이로 정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로..
오오이시 스스무大石進 사건 `오오이시 스스무`는 특히 검도 역사상 중요한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오이시 스스무는 조부로 부터 ‘오시마大島류‘ 창술과 ‘아이스愛洲 카게류‘ 검술을 주입받고 면허를 받기도 했습니다. 오오이시는 양 손 찌르기 , 왼 손 하나 만으로 찌르기 , 여기에 더해서 허리 몸통베기 등의 기술을 사용했습니다. 돌을 매달아 놓고 이것을 찌르는 케이코를 했다고 전해지는 그는 , 특히 왼 쪽 한 손찌르기를 즐겨했다고 전해 집니다. 오오이시가 찌르기 기술을 특기로 한 것은 , 그가 창술을 이미 충분히 숙지한 것과 관계가 없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오이시는 호구에 독자적인 개량을 더하고 , 5척 3촌(161.4cm)이나 되는 긴 죽도를 사용했습니다. 통설에 의하면 이 길이를 만들기 위해서 ..
경신명지류鏡新明智流 `모모노이 슌조우桃井春蔵`의 사학관士學館 `쿄우신 메이치류鏡新明智流`는 안영安永년간(1772~1781) 에 `모모노이 하치로 자에몬 나오요시桃井八郎佐衛門直由` 가 창시한 것 입니다. `나오요시`는 원래는 `야마토 코리야마大和郡山` 번(현재의 나라현) 의 `야나기 사와柳沢` 가문의 가신 이었습니다만 , 사임하고 무사수행을 해서 , 토다戸田류 , 잇토우一刀류 , 야규柳生류 , 그리고 호리우치堀内류 등을 배우고 안영2년(1773) 에 에도의 니혼바시日本橋 카야바 쵸에 도장을 마련했습니다. 이것이 후에 대도장으로 성장해서 일세를 풍미 하게 되는 사학관士学館의 시작 입니다. 2대 째 `모모노이 슌조` 때 도장을 `미나미 하치오보리南八丁堀 오토미 쵸大富町 `아시리` 하구 근처로 옮깁니다. 사학관..
북진일도류北辰一刀流 치바 슈우사쿠 의 현무관玄武館 `치바 슈우사쿠千葉周作`는 관정寛正6년(1794) 오우슈奥州 (지금의 미야기 현)에서 태어나 , 아명을 `오토마츠於菟松` 라고 했습니다. 조부인 ‘치바 키치노 조우千葉吉之丞‘는 이와키磐城国 국의 소마 相馬번의 검술사범으로 스스로 유파를 `북진몽상류北辰夢想流(호쿠신 무소류)` 라고 칭했습니다만 , 후에는 의사로 전업합니다. 슈우사쿠의 아버지도 같은 의사 였습니다만 , 집안에 전해지는 검술에 있어서는 뛰어난 기량을 가졌었다 합니다. 슈우사쿠는 후에 , 작은 치바 라고 불리던 남동생 `사다키치定吉` 와 함께 이 아버지로 부터 대대로 이어진 북진몽상류를 배웁니다. 문화文化 6년 (1809) 에 이 부자는 , 에도근교의 `마츠도松戸`로 이사합니다. 슈우사쿠는 이 ..
신류新流의 대두 중세로 부터 후기에 걸쳐서 "죽도대련 검도"가 성행하면서 , 이 기술에 뛰어난 유파가 새롭게 등장합니다. "죽도대련 검술" 의 형태를 만든 `나가누마 시로 자에몬 쿠니사토` 의 지키신카게류直心影流 와 , 이것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를 만들었던 `나카니시中西 파 잇토우류一刀流` 는 그 한 예 입니다. `지키신 카게류直心影流`는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 카시마鹿島의 `마츠모토 비젠노 카미` 와 `카미이즈미 이세노 카미` 로 부터의 흐름을 이어받아 , `쿠니사토`의 아버지인 `야마다 헤이자에몬 미츠노리`를 초대初代로 해서 일으킨 유파 입니다. ‘지키신 카게류`는 `오다니 세이 이치로男谷精一郎` 와 `시마다 토라노 스케`島田虎之助 `사카키바라 켄키치榊原鍵吉` 라는 저명한 검객들을 배출합..
나카니시 츄우죠 츠구타케中西忠蔵子武 로 부터의 보급 ‘지키신 카게류直心影流` 에서 "죽도 대련 케이코" 가 행해지게 되고서 부터 약 50년 후의 보력宝暦 명화明和 년간(1751~1772) 에 이번에는 ‘잇토우류一刀流‘ 의 `나카니시 츄우죠 츠구타케` 가 도구를 보다더 개량해서 "시나이 죽도" 에 의한 케이코를 종래의 형形 케이코에 더하기 시작 했습니다. 당시 , ”시나이 대련 케이코” 에 대해서 찬반 양론이 있었습니다만 이 케이코법의 채용에 대해서는 ‘잇토우류‘ 안에서도 비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노小野파 잇토우류‘ 의 종가도 , 나카니시 츄우죠의 "시나이 대련 케이코" 채용에 비판적 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도구를 착용하고 "시나이" 로 서로 공격하는 이 케이코 법은 시합의 형식으로 행할 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