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輪書오륜서 탐구...地의 卷(1)

 

 

② 나이 쉰이 된 후 , 그는 1634년 홀연 풍전 후쿠오카(지금의 후쿠오카 부젠시)에 나타난다. 여기에

기록된 바와 같이 , 병법으로서 납득이 가는 어떤 것을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 곧 젊은시절과 같

이 사관仕官을 맡거나 해서 자기 자신을 저잣거리의 파는 물건으로 내놓지 않았다. 그는 병법가이고 ,

병법 만이 그의 일 이었다. 그리고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 사원이 아닌 고문역이 되기를 원했다. 이렇

게 해서 그는 , 풍전 후쿠오카의 코구라 번 오가사와라小笠原 가家의 가객이 된다.

그렇다고는 하나 , 그의 병법은 이미 만예萬藝에 통해 있었고 무사시는 곧 새롭게 탐구할 길道도 없고 ,

다시한번 허무함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그 손에 잡히는 것 없는 무료함에 오래된 취미였던 화서조각畵

書彫刻등을 시작해 보지만 , 그 허무함을 메우기에는 부족했다. 시대는 이미 무사나 병법의 시대로 부

터 평민이나 상인들의 시대로 변해가고 옮겨가고 있었다. 1637년 시마하라島原의 난亂에 무사시는 오

가사와라 타다자네小笠原忠真를 따라 출진하지만 , 중 하급 무사들에게는 , 대장도 아니고 병졸도 아닌

고문이라는 무사시의 입장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 그의 실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하는 일이 있

었을 지도 모른다.

그 후 , 무사시는 그 난으로 공적을 올린 양자 미야모토 이오리宮本伊織를 코구라 번의 가로家老에 승

진 시키면서 자신도 , 난 중에 얼굴을 알게된 히고 쿠마모토 번 가로 마츠이 오키나가의 인맥으로 , 동

번 번주 호소카와細川가의 손님 신분으로 초청받아 간다. 예순에 가까워진 무사시는 , 이 즈음 이미 병

을 앓는 날이 잦았고 , 시마하라에서의 발의 상처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사기死期를 깨닫

기에 이르러서 , 무사시는 돌연 , 그 허무의 자신이야 말로 잘라내고 버려야 할 것 이었다는 것을 알아

챈다. 죽음에도 또한 무사는 이기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는 죽어가는 자기자신에게서 이기는

자기를 찾아 내기라도 하듯 , 태양과 관음을 거울로 삼는 성찰에 얼마남지 않았던 날들을 쓴다. 태양이

란 밀교에서 말하면 우주의 근본인 여래如來(완전자)이고 , 또 , 관음은 제법관제와 중생구제를 위해서

자재변화 하는 보살(구도자) 이다. 무사시는 당시의 무인으로서는 , 아니 문인을 포함해서도 그 평균을

넘어서는 고학高學이었고 , 이와같이 유학 , 도교 , 밀교등의 색채도 짙다. 그러나 , 이러한 자기 연찬硏

鑽은 , 단지 자기 한 사람의 문제인 까닭에 , 여러 학문의 고사도 권위도 그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그리

고 , 납득이 가기까지 자기자신의 철학과 이치를 남김없이 철저히 추구해서 기록한 것이 , 이 『五輪書』

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