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검도의 역사...(46)

 

3 . 도검의 사상  삼종三種의 신기神器로서의 `쿠사나기노 츠루기草薙剣`

 

천황과 삼종의 신기

 

특히 중세이후 일본의 도검사상의 중핵이 되는 것은 삼종의 신기로서의 `쿠사나기 츠루기` 입니다.

삼종의 신기라는 것은 `쿠사나기노 츠루기` 외에 `야타노 카가미鏡` , `야사카 니노 마가타마曲玉` 의 세가지를 말하는데 천황의 위상을 상징하는 것으로 황실에 전해져 왔던 것들 입니다.

원래가 천황은 고대일본에 있어서 주술적인 왕 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신에 의지한 고대사회에 있어서 여러 신과 교신하고 주술을 구사하고 오곡풍요를 가져오고 , 천재天災로 부터 사람들을 구해 왔던 것이 천황 이었습니다. 이 때에 사용되어진 주술의 도구가 , 검劍이었고 거울鏡이고 곡옥曲玉 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일본의 주술행위는 여러 신들의 보호하에 행해 졌습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직접 신들과 교신하는 것은 어려웠습니다만 , 주술의 왕인 천황은 특정의 검과 거울과 옥을 매개로 해서 여러 신들과 이어질 수 있었고 여러 신들의 힘을 현실의 세계에서 발휘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앞에서 보았듯이 영검은 신화 속에서 신들의 세계인 천상계와 인간이 있는 하계를 왕래하고 ,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것으로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 주술의 도구로서 삼종三種의 신기神器는 대대로 다음의 천황에게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일본인의 정신세계는 신화의 상상에 의해서 그 방향성이 잡힌 부분이 상당히 큽니다만 , 신화 속에서 말해지는 삼종의 신기는 천황의 위치에 연관된 제도로서 사회 속에서 정착해 갑니다.

그러나 헤이안平安 조정 이후의 공가公家사회에 있어서 삼종의 신기는 그다지 중요하게 취급된 일이 없었다는 것은 주목해야 할 점 입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여기에서 한가지 덧 붙여 두자면 , 삼종의 신기 중에서 신검神劍과 신경神鏡에 대해서는 그 신비한 위엄을 두려워해서 스이진崇神 천황의 때에 별도로 모조품으로 보검과 보경을 만들어서 이것을 궁중에 전하게 하고 원래의 신검과 신경은 각각 아츠다熱田신궁과 이세伊勢신궁에 모시도록 하고 있습니다.

 

 

무사武士와 삼종三種의 신기神器

 

헤이안 시대 후기 즈음으로 부터 무술을 몸에 익힌 군 업무에 종사하는 무사집단이 대두하면서 삼종의 신기는 갑자기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겐페이源平의 분쟁(1180~1185일본내의 내란)을 묘사한 『헤이케 모노가타리平家物語』 에는 실로 많은 삼종의 신기에 관한 기술을 찾을 수 있습니다.

지는 싸움을 강요받게 되는 헤이케平家는 당시 6세의 안토쿠安德 천황을 옹립하고 삼종의 신기를 가지고 , 쿄토에서 서해로 도망하게 됩니다. 이 후에 겐지源氏 와 헤이케平家 에서 엄청난 삼종의 신기를 둘러싼 쟁탈전이 펼쳐집니다.

겐지는 헤이케가 가진 삼종의 신기를 되찾기 위해서 여러가지 방법을 구사하고 , 이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드디어 마지막에는 주인 이던 신사에서 신에게 기도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나 헤이케는 이것을 절대 내놓지 않았습니다. 겐지 헤이케 쌍방은 , 삼종의 신기에 대한 집요하기 까지한 집착이 있어서 , 집념까지 느끼게 할 정도 였습니다. 그들의 삼종의 신기에 대한 여기까지의 집착은 , 도대체 무엇 이었을까요.

그들은 무력武力의 힘을 빌려서 일족의 존망을 걸고 싸웠습니다만 , 그 무력행사에는 대의명분大義名分이 필요 했습니다. 결국 천황측의 군대로서 싸운다고 한다면 , 이것은 사회적으로는 정의 입니다. 역으로 반대는 악의 무리가 되는 것입니다.

천황이 아직 어렸다는 이유도 있지만 , 당시의 사회에서 천황의 위상을 상징하는 삼종의 신기를 실제로 가지는가 아닌가는 천황과 행동을 함께 하고 있는 것과 같은 모양새로 , 혹은 그 이상으로는 관군官軍의 증거가 되었다는 것 입니다.

앞 시대의 공가 公家사회에서는 오히려 중시되지도 않았던 삼종의 신기는 본래 공가 사회제도에 관여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 무가武家의 세상이 되어 급격하게 각광을 받고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