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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剣道の歴史 일본검도의 역사

일본 검도의 역사...(28)

 

 

경신명지류鏡新明智流  `모모노이 슌조우桃井春蔵`의 사학관士學館

 

`쿄우신 메이치류鏡新明智流`는 안영安永년간(1772~1781) 에 `모모노이 하치로 자에몬 나오요시桃井八郎佐衛門直由` 가 창시한 것 입니다. `나오요시`는 원래는 `야마토 코리야마大和郡山` 번(현재의 나라현) 의 `야나기 사와柳沢` 가문의 가신 이었습니다만 , 사임하고 무사수행을 해서 , 토다戸田류 , 잇토우一刀류 , 야규柳生류 , 그리고 호리우치堀内류 등을 배우고 안영2년(1773) 에 에도의 니혼바시日本橋 카야바 쵸에 도장을 마련했습니다. 이것이 후에 대도장으로 성장해서 일세를 풍미 하게 되는 사학관士学館의 시작 입니다.

2대 째 `모모노이 슌조` 때 도장을 `미나미 하치오보리南八丁堀 오토미 쵸大富町 `아시리` 하구 근처로 옮깁니다.

사학관이 에도 삼대도장 등 이라고 불리면서 가장 번성했던 시기는 4대째 `모모노이 슌조우 나오마사桃井春蔵直正` 의 때 였다고 말합니다. `나오마사直正`는 원래는 누마츠沼津 번의 번사의 두번 째 아들 이었습니다만 에도로 나와서 2대 째의 ‘모모노이 슌조우‘에게 입문하고 그 후에 더 높은 단계의 가르침을 얻고서 가영嘉永2년(1849) 에 슌조우의 이름을 습명襲名(일본 전통예능에서 자주 있는 것으로 대대로 이름을 전하고 기술과 전통을 잇는것) 합니다. 곧고 바른 기품이 있고 격조가 높은 검을 사용한다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문인門人에는 , 토사土佐 번의 `타케치 한뻬이타武市半平太` 와 `사람베는 이조우` 로 불리던 `오카타 이조우岡田以藏` 등이 있었습니다.

 

 

12 . 근세후기 부터의 막부 말의 검술

 

타류시합의 금지

 

장난삼아 사람을 상처입히고 혹은 죽이고 그래서 그 수 만큼의 원한을 남기는 것을 염려하여 에도시대 초기에 막부는 기본적으로 타류시합을 금지 했습니다. 그러나 에도시대 중기에 "죽도 대련 검술" 이 탄생하고 이것이 보급된 이래로 , 어느 정도의 안전성이 확보 되었다는 이유로 서서히 타류시합의 금지가 풀리기 시작합니다. 일설에 따르면 , 타류시합의 해금解禁 천보天保년간(1830~1844) 으로 `미즈노 타다쿠니水野忠邦` 가 노년의 중반에 있었던 시기 였다고 합니다만 그 이전에도 이미 왕성하게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각 번藩 단위로 그에 맞는 대응이 있었고 일괄적 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무사수행武者修行의 부활

 

무로마치(1336~1573) 말기로 부터 왕성하게 행해져 왔던 무사수행은 , 여러 나라(일본 국내)를 돌아 보고 이름 있는 검객과 타류시합을 하면서 솜씨를 연마하는 것으로 , 많은 검호들이 행해 왔습니다만 , 타류시합의 금지에 의해서 쇠퇴해서 오랫동안 행해 지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해금되면서 , 무사수행은 다시 부활하고 활기를 찾아갑니다.

특히 서 일본 여러 번藩에서는 , 관정寬政기(1789~1801) 시절 부터 타류시합을 인정하고 있었던 탓도 있고 , 일찍이 무사수행을 나서는 이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무사수행의 부활은 그 때까지 폐쇄적 이었던 타류他流 간의 교류를 활발하게 하고 검술의 활성화에 크게 공헌 했습니다. "시나이 죽도" 를 사용한 소위 「시합검술試合劍術」 이 급속히 발전해 갑니다.

이 시대의 무사수행으로 특히 유명한 것이 , 야나가와柳河 번사藩士로 `오오이시 신카게류大石神影流` 를 연 `오오이시 스스무 타네츠구大石進種次` 와 쿠루메久留米 번사藩士로 신카게류神影流의 `카토다 헤이 하치로 시게히데加藤田平八郎重秀` 의 , 에도를 향해서 떠난 무사수행 입니다.

`오오이시 스스무`는 천보天保3년 (1832) 경의 말 쯤에 , 천보10년(1839) 의 두 번에 걸쳐서 에도로 향하고 , 유명한 검사들과 시합을 했습니다. 또한 `카토다 헤이하치로` 도 ,천보9년에 에도까지 무사수행에 나서서 ,`쿠보타 스케타로窪田助太郎` `오다니 세이이치로男谷精一郎` ` 나카니시 츄우베이中西忠兵衛` `치바 슈우사쿠千葉周作` `사이토 야쿠로斉藤弥九郎` `모모이 슌조우桃井春蔵` 라는 쟁쟁한 검사들과 칼을 맞댔다고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