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부 문화편
1 . 도검刀劍의 사상
도검사상의 중요성
검도의 문화성에 대해서는 제가 특히 주목하고 있는것이 도검의 사상입니다. 이것은 도검을 단순한 무기로서가 아니라 신성한 것으로서 보고 있는 사상입니다.
도검이 단순한 무기였다면 이것을 조작하는 검술도 단순한 살상의 기술에 지나지 않았을 것 입니다. 도검이 그 이상의 신성성을 지녀왔기 때문에 검도는 문화로서 심화해 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도검의 사상은 검도의 문화성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 상당히 중요합니다.
도검사상의 전래
도검의 사상의 전래와 보급에 대해서는 이미 역사편의 2장에서 설명했기 때문에 , 여기에서는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 일은 없습니다만 도검은 다른 금속문명과 같이 일본의 야요이 시대 초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3세기 말에 중국대륙으로 부터의 사상과 함께 전해져 왔습니다.
그 루트를 더듬어 보자면 , 고대중국의 춘추시대에 해당하는 기원전 6세기로 부터 4세기 경의 , 오吳나라 나 월越나라 등의 지방에서 시작 되었다고 생각해도 큰 무리는 없겠지요. 여기에서는 주로 양날兩刃의 검이 사용되어졌다 하는데 이것에 대해 많은 영검靈劍전설이 만들어 지게 됩니다.
태아太阿의 영검靈劍전설
고대중국의 오월吳越지방에 전해오는 영검전설로는 우선 주목해 두고 싶은 것이 , 태아太阿의 검劍에 대한 전설 입니다.
검의 감정사로서 유명했던 풍호자風胡子 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초楚 나라의 왕의 명령으로 구야자欧冶子라는 인물과 간장干將이라는 인물에게 철의 검을 만들도록 의뢰를 합니다. 이 둘은 오월 지방에서 유명한 검의 장인 이었습니다. 완성된 검은 세 자루가 있어서 용연龍淵 , 태아太阿 , 공부工夫 라 하고 멋지게 완성된 작품 이었다고 합니다.
진晋 나라의 국왕은 그 소문을 듣고 이것을 가지고 싶어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던 탓에 , 초 나라의 성을 3년간이나 포위하고 계속 공격했다고 합니다. 이미 성의 안에는 무기도 없어지고 식량도 다해서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 왕은 다음과 같은 행동에 나섭니다. 왕은 , 태아太阿의 검을 가지고 성의 망루에 올라가 이 검을 후리며 자신의 군대를 지휘합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 적은 괴멸적인 타격을 받고서 멸망했다고 합니다. 『월절서月絶書』 라는 문헌에 묘사된 전설입니다만 여기에서는 최후에 중요한 것을 명기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일어난 신비한 사건은 , 왕의 힘이 아니라 , 어디까지나 검의 영험한 위력에 의한 것이라고 , 이러한 이야기들이 도검刀劍을 신비화 하는 사상의 시작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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